xxxx

홍해를 지나 시내로 가는 도중의 이스라엘 (출13:17-18:27)

아티클 / 성경 주석

   하나님이 단호하게 자기 백성을 이끌어 홍해를 건너게 하고 애굽의 폭력적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순간, 하나님의 근본적인 일은 극적인 열매를 거뒀다. 혼돈의 물을 거두고 마른 땅을 창조하셨던 하나님, 홍수 속에서도 노아의 가족을 이끌어 마른 땅에 도달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홍해 물을 갈라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마른 땅”을 밟으며 건널 수 있도록 하셨다(출 14:21-22).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시내(Sinai)까지의 여정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모세, 아론 및 여러 사람이 열심히 일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진정한 일꾼은 하나님이셨다.

 

분쟁 해결의 권한을 위임하다 (출18:1-27)

목차로 돌아가기

   애굽으로부터 시내까지 이르는 동안에, 모세는 장인 이드로와 다시 만났다. 이스라엘인에게 이방인으로 지내 왔던 이드로는 공동체 내에서의 공의에 대해 모세에게 매우 긴요한 조언을 줬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공의로 확대됐다.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의 십장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한 적 있었다. 해방된 사람으로서 이제 그들은 그들 사이의 분쟁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온당하게 구했다. 월터 브루그만은 성경적 믿음이 단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치유와 회복에 대한 열정을 매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실천하는 것이며, 부정직한 이득은 끊임없이 거부하는, 힘든 것이다.”[1]

 

   분쟁에 말려든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것이 모세가 하고자 하는 일 중에 하나였음을 우리는 앞서 배운 바 있다. 처음에 그가 개입하려고 나섰을 때, 모세는 이런 항의를 받았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출 2:14).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통치자와 재판관의 역할을 맡아 달라는 요구가 너무 많아 많은 사람이 모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의 판결을 기다릴 정도였다(출 18:14; 신 1:9-18 참조).

 

   모세의 일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는 사람 사이의 분쟁에 합법적인 결정을 내려 줬다. 둘째, 그는 도덕 및 신앙적인 지도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교훈을 가르쳐 줬다.[2] 이드로는 모세가 홀로 그런 고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 주목했는데, 그는 그것을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출 18:17). 더 나아가서 그것은 모세에게도 해가 되고 그가 돕고자 애쓰는 사람에게도 불만족스런 일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감당하되, 여타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는 것이 이드로의 해법이었다. 이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어려운 사건을 판결하는 것은 모세가 맡고, 다른 사건은 하위 재판관이 담당하는 그런 4단계 사법 체계였다.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지혜의 핵심은 재판관의 자격이었는데, 이들은 지파 구분이나 종교 성숙도에 따라 뽑히지 않고 네 가지 자격검증을 거쳐 선발됐다(출 18:21). 첫째, 그들은 유능한 자여야 했다. “chayil[하일]을 가진 자”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능력, 지도력, 경영 능력, 지략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이를 뜻했다.[3] 둘째,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다.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산파의 경우처럼, 이것은 꼭 종교적인 품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와 종교 경계를 넘어 통상적으로 인식되는 도덕성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셋째, 이들은 “진실”한 자여야 했다. ‘진실’이란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행동 양식이기도 하므로, 이들은 행위뿐만 아니라 성품도 진실하다고 하는 객관적인 증거를 갖고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부당한 이득을 미워하는 자여야 했다. 이들은 부패가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를 알아야 했으며 뇌물의 관행과 모든 종류의 파괴를 경멸하고 그런 악습으로부터 사법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호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했다.

 

   위임은 지도력이 요구되는 일에 있어 필수적이다. 모세가 예언자, 정치가, 재판관으로서 독보적인 은사를 지닌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재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 됨이 무엇인가를 잊은 사람이다. 리더십의 은사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적절하게 나눌 줄 아는 은사다. 지도자라면, 모세처럼 필요한 자질을 분별하고 권위를 부여할 사람을 훈련하며 그들에게 책무를 지울 수단도 마련해야 한다. 지도자도 곁에서 그들의 책무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세의 경우에는 이드로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단락은 구약의 예언자 중 가장 위대하게 여겨지는 사람도 그에게 책임을 물을 권세가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음을 아주 솔직하게 보여 준다.

 

   지혜와 과감함, 자비로움을 갖춘 리더십은 모든 공동체에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지만 출애굽기는 은사를 지닌 지도자가 권위를 잘 발휘하는 것보다 은사 지닌 자들이 성공할 수 있는 공동체 리더십 구조가 개발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과 과정임을 보여 준다. 위임은 후임 지도자를 키우는 방법일 뿐 아니라 조직이나 공동체의 역량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모세가 이런 조언을 아주 신속히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넓게 보면, 우리는 모세(히브리인이며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가 한 미디안 제사장을 통해 그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향해 완전히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 문제와 관련된 차원에서 본다면, 크리스천이 다양한 전통과 종교로부터 제공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또 존중하는 것도 권장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표시, 믿음이 약하다는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부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지혜의 인용구를 너무 자주 들이댐으로써 비신자에게 편협하고 신뢰가 안 가는 싸구려 증인으로 인식될 수가 있다. 크리스천은 우리가 받아들인 세부적인 조언이 밖에서 왔는지 아니면 안에서 왔는지를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확신한다.[4]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Genesis to Leviticu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829쪽.

Umberto Moshe David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Skokie, IL: Varda Books, 2005), 219쪽.

‘chayil’이라는 단어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www.theologyofwork.org)에서 “용감한 여인”(The Valiant Woman)이라는 제목의 글을 검색해 글 도입부에 나오는 Bruce K. Waltke and Alice Matthews, Proverbs and Work, “Proverbs 31: 10-31” 내용을 참조하라.

Arthur Holmes, All Truth is God’s Tru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3).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