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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와 일

아티클 / 성경 주석

   베드로후서는 거룩한 삶과 고난을 견디는 인내의 필요성에 관해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보았던 여러 주제들을 강화한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반복해서 다루지 않고, 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현재의 하늘과 땅은 심판 날에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불로 멸망시키기 위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벧후 3:7, 현대인의성경)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일은 그 가치가 무엇인가? 대럴 코스덴(Darrell Cosden)의 중요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살펴본다면, 이 땅에서의 노동은 하늘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1]

 

 Darrell Cosden, The Heavenly Good of Earthly Work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06)

이 땅의 끝, 영원의 시작(벧후3:1-18)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까?[1] 대럴 코스덴은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의 논쟁의 핵심인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1) 물질 세상의 선함을 확인시켜 주고, (2) 지금 세상과 새 창조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2](3) 아직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표징이다.  우리의 노동은 궁극적인 가치가 있다. 구속받고 성화된 우리의 수고의 열매는 하늘을 그 본향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장은, 코스던의 일의 신학에서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면모들 즉 (1) 창조물의 타고난 선, 그리고 (2) 지금의 세상과 다가올 창조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려 주는 것 같다.
 

  베드로는 여기서 악을 심판하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불법자들에게 맞선다(벧후 3:3-4). 그러면서 현재 세계와 미래 세계의 연속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우주의 종말 또는 소멸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1.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2.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벧후 3:11).
  4.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5.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눈에 보이듯 너무나 가깝다고 속단하지는 말라.[3] 베드로가 사용하는 종말의 이미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는 구약 성경의 예언적 계시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과 제2성전 시대 유대 문학은 모든 의인의 정화와 악인의 멸망을 언급할 때 불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사용했다.[4]

   베드로후서 2장 7절, 10절과 3장 12절을 종말묵시문학의 관행적 흐름안에서 읽어 보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 버리는 이미지를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과정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5]

 

  이것은 베드로가 첫 번째 서신에서 불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준다. 즉 수신자인 성도들도 역시 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은 시련을 거칠 터인데, 이 불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과 영예를 얻으리라는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다(벧전 1:5-7). 이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소멸될 것을 강조한다기보다 모든 악이 궁극적으로 단절될 것임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녹아 버리다’, ‘불에 풀어지다’, ‘심판’, ‘예비된 불’ 같은 용어로 세상을 변화와 시험의 면에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더글러스 무(Douglas Moo)는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에서 사용된 ‘불에 녹아 버리다’는 헬라어 ‘lu?[루오]’가 멸절의 의미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뜻한다고 해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undone’(풀린 상태의 또는 미완의 - 옮긴이 주)이라는 번역을 제안한다.[6]

 

   베드로는 노아 시대를 언급하면서(벧후 3:5-6) ‘물의 넘침’을 완전한 멸절로 풀이하는 해석을 경계한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 자체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정화하는 의미였다. 노아와 가족, 소유와 방주 속 동물에 국한된 인간의 선은 보존되었고, 생명도 물리적 지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끝으로, 궁극적 미래에 대한 베드로의 긍정적인 비전을 물질계 질서의 쇄신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것은 보잘것없고 육체를 벗어난 저세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포함한 새로운 우주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드러난다고 했지 파괴된다고 하지 않았다. 불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일들’이 남아있으리라는 뜻이다. 이상은 본 베드로후서가 현재 일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신학의 주된 근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본 서신이 그런 신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상세하지는 않지만, 베드로후서는 현재 땅에서 하는 일과 미래에 경험할 일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 모든 악은 결국 소멸되지만, 모든 의로운 것들은 영원한 본향에서 새 창조를 맞이할 것이다. 불은 소멸하면서 더불어 정화시킨다. 풀어짐(용해됨)은 일의 끝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참된 결말을 이끌어 낸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발은 도래할 새로운 창조 세계의 원형이다. 그분의 육신에서 찾은 진리를 우리는 이 비전에서도 찾게 된다. 아무리 잘해 봐야 우리가 행한 일은 모순투성이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용서받고 변화됐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제집(본향)을 찾았다. Cosden, The Heavenly Good of Earthly Work, 76쪽. 

이 복잡한 구절에 대한 논의를 보다 정확히 알고 싶다면 Richard J. Bauckham, Jude, 2 Peter, eds. Bruce M. Metzger, David A. Hubbard, and Glenn W, Barker,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83). 리차드 J. 보컴, 《WBC 유다서 · 베드로후서》(솔로몬 역간); and John Dennis, “Cosmology  in the Petrine Literature and Jude,” Cosmology and New Testament Theology, eds. Jonathan Pennington and Sean McDonough (London: Continuum, 2008), 157-177쪽을 보라

예를 들어 다음을 살펴보라. 사30:30; 66:15-16; 나1:6; 습1:18; 3:8; 슥13:7-9; 말3:2-3; 4:1-2; Sirach 2; Wisdom of Solomon 3. 신약에서도 역시 불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 고전3:10-15; 벧전1:5-7; 4:12-13 등.

예를 들어 다음을 살펴보라. 사 30:30; 66:15-16; 나 1:6; 습 1:18; 3:8; 슥 13:7-9; 말 3:2-3; 4:1-2; 신약에서도 역시 불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 고전 3:10-15; 벧전 1:5-7; 4:12-13 등을 보라.

Douglas Moo, “Nature  in  the New Creation: New Testament Eschatology and  the Environment,”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9, no. 3 (2006), 468쪽. 또한 불 이미지를 하나님이 세상을 정련시키는 과정으로 나타낸 알 월터스(Al Wolters)의 주장도 보라. Al Wolters, “Worldview and Textual Criticism in 2 Peter 3:10,”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9 (1987), 405-413쪽.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