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께 십계명을 받았다. NIV 스터디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핵심 규정이다. 십계명이 후대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십계명은 서구 세계 전반에 뿌리 내린 도덕 원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어떤 믿음, 예배, 행위를 기대하시는지를 요약해서 설명해 준다.”[1]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율법을 크리스천이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주제는 어마어마한 논쟁거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 본문이 실제로 전하는 내용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한다. 그것이 공통분모가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크리스천이 출애굽기에서 교훈을 도출해 내는 다양한 방식도 인정하고, 또 존중하고자 한다.
Kenneth Barker, ed., The NIV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69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의미 (출19:1-24:18)
목차로 돌아가기우리는 먼저 출애굽기가 성경의 일부이지 독립된 법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크리스천을 위한 도덕 법전일 뿐이라는 일반 견해는 성경의 본질과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이 땅,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즉 무엇이 잘못됐으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기록한 책이 성경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도덕적 가르침 또한 지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mission)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은 사람의 온전한 반응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사명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사람의 그런 반응에는 윤리적 차원이 엄연히 포함된다.[1]
“law”(율법)라는 영어 단어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말이지만 핵심 히브리 단어인 ‘Torah’(토라)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은 아니다. 이 용어가 우리 앞에 놓인 논의 전체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이 히브리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토라’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따랐던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로 창세기에서 한 번 사용된다(창 26:5). 이 단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명령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78:1).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의 토라는 모세오경과 나머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민사 및 사회 행위의 규범뿐 아니라 공식 예배 예식과 관련된 하나님 백성의 행동 표준을 나타낸다.[2] 토라의 성경적 개념은 ‘신적 권위의 명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입법부에서 만든 법이나 자연법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풍부하고 권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별도의 번역 없이 ‘토라’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일련의 구체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토라는 언약의 일부로 간주된다. 언약이 토라의 일부인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 전체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관계를 말한다(출 20:2). 언약으로 백성과 관계를 맺은 왕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예배하고 행동하기를 원하는지 율법을 통해 명시하신 것이다. 순종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서약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었다(출 24:7).
이것은 일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직장에서 우리가 우리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크리스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 태도에서 다시 그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요일 4:19-21).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계명의 범위는 교회, 카페,집, 공공장소, 일터 등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나 그 계명을 적용하며 살기 원하신다.
Wright, The Mission of God: Unlocking the Bible’s Grand Narrative, 357-358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Peter Enns, “Law of Go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4:893. 그 단어는 또한 신명기서의 역사적 핵심이 “율법서”(신 31:26)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한 문헌의 본체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모세오경은 “토라”라고 불렸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
크리스천을 위한 율법의 역할 (출20:1-24:18)
목차로 돌아가기한 개인이 출애굽기나 특히 레위기의 어느 구절에서 논점을 이끌어 낸 다음, 그 교훈을 현대에 적용하는 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반론에 부딪힌다. “좋아요. 하지만 성경은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우리에게 베이컨이나 새우를 먹지 말라고 하잖아요! 게다가 내 옷에 면과 폴리에스테르가 섞여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크게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해요”(출 21:2-11; 레 11:7, 12; 19:19 참조). 이런 일은 크리스천 가운데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성경을 공적인 분야에서 ‘일’이라는 주제에 적용할 때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엇이 오늘날 적용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경을 모순되게 대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진실로 변화될 수 있을까? 출애굽기와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의 다양성은 이런 유형의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도전은 크리스천들이 토라와 구약을 그리스도와 신약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다양한 방식에서 나온다. 기독교에서 토라 문제는 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일에 관해서 성경이 다루는 부분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정리는 과도하게 편협하지 않은 차원에서 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신약과 율법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것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제는 ……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라는 바울의 두 진술을 모두 포함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구절이 아니고, 토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은 사람에게 공의, 지혜, 내적 변화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계속해서 계시해 준다는 하나의 공통된 사실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건한 본질에 대한 표현이자, 구원이라는 위업에 따르는 결과로서 토라를 주셨다. 토라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을 보고 하나님 및 타인과 평화롭게 살기 위한 어떤 기준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훈을 우리가 삶의 크고 작은 실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그 교훈에 순종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몇몇 특정 율법을 보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비현실적인 완벽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작거나 시시한 것이 아님을 율법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토라는 외적 행위에 대한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탐심 같은 마음의 문제도 거론한다(출 20:17). 후에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을 정죄하셨을 뿐 아니라 분노와 정욕의 뿌리도 꾸짖으셨다(마 5:22, 28).
하지만 오늘날 삶의 실제 문제에 토라를 적용하며 토라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수천 년 전에 행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율법의 일부는 영구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이미 구약은 우리에게 암시한다. 성막은 영구적인 구조물이 아니고 성전도 이스라엘 원수의 손에 무너져 버렸다(왕하 25:9). 예수님이 파괴된 “성전”을 삼일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희생을 통한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 것이었다(요 2:19).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성전, 제사장 제도 및 제사장 활동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구현했다. 음식에 대해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 즉 ‘사람이 불결하게 되는 것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모세 언약의 특정 음식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막 7:19).[1] 더욱이 신약의 하나님 백성은 그들에게 토라의 제재 규정을 적용할 합법적 권한이 없는 세계 여러 국가와 문화 속에서 살았다. 이에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여러 문제를 논의했고, 유대 율법의 세부사항이 이방 크리스천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행 15:28-29).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당시 신학에 비춰 볼 때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2]
신약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도 토라를 확증해 주는데, 거기에는 간음, 살인, 도적질, 탐심을 경계하라는 계명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계명도 있다(롬 13:8-10; 갈 5:14). 팀 켈러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우리가 예배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3]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새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속에 율법을 넣어 두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렘 31:33; 눅 22:20). 모세 언약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실함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에 달려 있었는데, 결국 예수님만이 이를 성취하실 수 있었다. 새 언약 아래의 신자는 그런 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긴다’고 말했다(롬 7:6, NIV).
일의 신학과 관련해서는 앞서 설명한 것이 몇 가지 내용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데, 그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을 직업과 관련된 현장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것이다. 노동자, 동물, 재산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율법은 하나님 본성의 영원한 가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노예처럼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십계명은 일반 용어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다양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다. 반대로 시종(servants), 가축 및 개인 상해에 대한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특정 역사, 사회적 맥락, 특히 당시 논쟁 거리였던 분야에서의 적용을 예시(例示)하는 것이었다.
율법은 올바른 행위의 예를 든 것이지만 적용의 실례를 모두 총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은 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태도, 동기, 욕구를 변화시키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율법을 존중한다(롬 12:1-2).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주님과 구주의 일과 의도에 대한 회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자기 방침과 행위를 주관하도록 구해야 한다.
Tim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The Gospel Coalition,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tgc/2012/07/09/making-sense-of-scriptures-inconsistency/.
James Tabor and Randall Buth, Living Biblical Hebrew for Everyone (Pasadena, CA: Internet Language Corp., 2003).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
일에 관한 명령 (출20:1-17 및 21:1-23:9)
목차로 돌아가기이스라엘 “언약서”(출 24:7)에는 ‘데카로그’(Decalogue; 문자 그대로 “말씀들” - 출 20:1-17)라고도 불리는 ‘십계명’, 출애굽기 21장 1절에서 23장 19절에 나오는 규례가 포함되어 있다. 십계명은 무엇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같은 일반 명령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규례는 판례법을 모아 놓은 것으로써, ‘만일 …… 한다면, 그때는 ……’ 형태를 사용해서 십계명을 특정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이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및 경제 세계에 맞는 것이었다. 이 법은 총괄적인 법전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서, 극악한 행위를 저지하고 난제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적 선례였다.[1]
Gordon J. Wenham, A Guide to the Pentateuch, Exploring the Old Testament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8), 71쪽.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
성막 건축 (출25:1-40:38)
목차로 돌아가기성막 건축은 그것의 예배(禮拜)적 요소 때문에 일의 신학의 범위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현대인인 우리는 그렇게 구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출애굽기 당시의 이스라엘은 삶을 거룩한 삶과 세속적 삶으로 구분해 다루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예배 활동과 예배 외의 활동을 우리가 구분 짓는다 해도, 출애굽기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게다가 성막 안에서 발생한 일을 우리가 오늘날 기준에 따른 ‘교회 일’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시대 성막 건축과 현대 교회 건물 건축 간에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 부분은 모두 유례없는 특정 시설을 확립하는 내용을 다룬다. 비록 성막 일은 해를 거듭하며 이어졌고 나중에는 성전에 속하게 됐지만, 성막 건축물 하나하나는 그 설계상 중심적이고 독립적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인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복제할 수 있는 모형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영토 도처에서 건축되고 운영되던 지방 신당은 이스라엘의 영적 건강에 해가 됐다.
마지막으로, 성막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허가된 공식 예배 장소를 제공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처음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오늘날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 1:14). 예수님의 일을 통해 신자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게 됐고 이제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됐다(고전 3:16).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일과 관련해 두 가지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건축가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신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에 관한 긴 부분은 하나님의 계명(출 25:1-31:11)과 이스라엘의 반응(출 35:4-40:33)을 따라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가셨다. 하나님은 성막 자체를 설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 여기서 “모양”(pattern)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tabnith)는 건물 및 그와 연관된 품목을 가리킨다. 오늘날 건축가는 청사진을 사용해 건축을 감독하는데, 이스라엘에도 어떤 원형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 성전은 종종 하늘의 성소를 지상에 복제한 장소로 묘사되었다(사 6:1-8). 성령을 통해 다윗 왕은 성전 ‘모양’을 얻었고 그것을 다윗으로부터 건네받은 아들 솔로몬은 그것을 바탕으로 성전을 건축했다(대상 28:11-12, 19).
이어지는 구절을 보건대, 하나님의 설계 디자인은 정교하고 절묘했음이 분명하다. 건축에 앞서 하나님의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은 이스라엘의 성소뿐 아니라 신약의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도 지켜졌다(고전 3:5-18).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만이 설계할 수 있는 도시인 것이다(계 21:10-27). 건축가로서 하나님의 경력은 그 건물에 대한 위엄도 한층 덧입혀 준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자기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속에 하나님의 설계가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가 메워야 할 세부 내용도 있지만, 성령은 그것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및 성막 일꾼 모두를 둘러싼 이야기는 일과 관련된 용어로 꽉 차 있다(출 31:1-11; 35:30-36:5).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 일과 관련해서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과 후람 왕의 역할 모델로서도 중요했다.[2] 그들이 다뤘던 일련의 기술에는 금, 은, 동을 가지고 하는 금속세공뿐만 아니라 돌과 나무를 가지고 하는 석공과 목공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상 제작에는 양털을 구입해 실을 잣고 물들이고 직조하는 일과 의상을 설계, 제조 및 재단하는 일과 수를 넣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장인은 관유와 향료를 준비하는 일까지도 맡았을 것이다. 이 모든 실무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일꾼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하나님이셨다. 본문에 나오는 “능력”과 “기능”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hokhmah)는 대개 “지혜”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말의 사용과 판단을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것은 명백히 직접 하는 실제의 일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넓은 신학적 의미에서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출 28:3; 31:3, 6; 35:26, 31, 35; 36:1-2).
이 구절이 보여 주는 광범위한 건축 활동은 고대 근동 지역 건축에 수반되던 것을 설명해 주지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영감을 부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하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을 것이라고 무난하게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본문이 꼭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종류의 일을 축복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그 외의 작업은 어떻게 봐야 할까? 약간 농담조로 얘기를 한다면, 만일 성막에 에어컨 장치가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도 좋은 계획을 세워 두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지혜로운 통찰을 나눈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적] 건축 과정과 비교해 너무 좁게 바라보거나 특정 직업만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비교 해석해서는 안 된다. 가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3] 하나님이 어떤 유형의 노동은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어떤 노동은 하찮게 여기셨다는 것이 여기 논점이 아니다. 특정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성경이 모든 고상한 직업을 일일이 나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창조된 게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듯이(막 2:27), 건물과 도시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평평한 지붕 주변에는 보호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고대의 법(신 22:8)은 사람에게 진정 이로우며 사람을 안전하게 해 줄 책임 있는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성막 일꾼에게 성령을 부으신 것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특정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일을 우리의 서툰 손에 내맡기지 않으신다. 직업의 다양한 수만큼 그분이 우리를 준비시키는 방식도 다양할 수 있다. 그분의 신실하심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 영적 은사를 나눠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해 나갈 것이다(고전 1:4-9). 그분은 우리에게 온갖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실 것이다(고후 9:8).
Victor Hurowitz, “The Priestly Account of Building the Tabernacle,”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5 (1985): 22. ‘tabnith’라는 단어는 우상(신 4:16-18; 시 106:20; 사 44:13), 제단의 복제품(수 22:28; 왕하 16:10), 손 모양(겔 8:3, 10; 10:8)의 3차원적 형상을 그려 보여 주고 있다.
Raymond B. Dillard, 2 Chronicles,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8), 4-5쪽.
Robert Banks, God the Worker: Journeys into the Mind, Heart, and Imagination of God (Eugene, OR: Wipf & Stock, 2008), 349쪽.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