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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피조 세계에서 일하게 되다 (창4-8장)

아티클 / 성경 주석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다(창 3:23-24). 그들은 깨어진 관계와 고통스런 일을 그대로 지닌 채 나와, 저항하는 땅에서 생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셨다. 그들에게 기술이 부족할 때는 옷을 지어 입히시기까지 하셨다(창 3:21). 저주가 그들의 생육하고(창 4:1-2) 번성하는 능력을 파괴하지는 못했다(창 4:3-4).

 

   창세기 1-2장의 일은 계속됐다. 여전히 갈아야 할 땅이 있었고 주시하고 묘사하고 명명해야 하는 자연 현상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열매를 맺어야 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일의 두 번째 단면도 성취되어야 했다. 즉 그릇된 것과 저질러진 해악을 치유하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것을 현대의 맥락에서 보면 농부, 과학자, 조산사, 부모, 지도자 및 창조적 기업 내 모든 이의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악을 억제하고 재난을 방지하고 피해를 복구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 의사, 장례 지도사, 교도관, 범죄 감식가 등 전문 직업을 가진 이들의 일도 필요하다. 사실 모든 사람의 일은 창조와 복구, 격려와 좌절,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에덴에 있을 때보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두 배나 더 많아졌다.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덜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처음 살인 (창4:1-25)

목차로 돌아가기

   창세기 4장은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첫 번째 살인 사건을 상술한다. 두 사람은 그들이 일한 소출을 가져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가인은 농부였으므로 땅의 소산 얼마를 드렸는데, 성경 내용을 보면 그것이 그가 산출한 가장 좋은 최초의 것이라는 암시는 없다(창 4:3). 아벨은 목동이었으므로 자기 양 떼 중에서 “첫째 것”을, 즉 가장 좋은 “기름진 부분”을 가져왔다(창 4:4). 비록 두 사람이 다 먹을 것을 생산했지만, 그들은 함께 일하거나 예배하지 않았다. 일터는 더 이상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호의적으로 보셨지만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셨다. 성경에서 분노를 최초로 언급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자포자기에 빠지지 말고 분개심을 극복해 장차 더 좋은 성과를 내도록 하라고 경고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라고 하나님은 물으셨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창 4:8; 요일 3:12; 유 1장 참조). 하나님은 그 행위에 이렇게 반응하셨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0-12).

 

   아담의 죄로 임한 하나님의 저주가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땅에만 임했다(창 3:17). 가인의 죄로는 가인에게 땅의 저주가 임했다(창 4:11). 더는 땅을 갈 수 없어서 농부 가인은 방랑자가 되어 마침내 에덴 동편 놋이라는 땅에 정착했는데, 거기서 가인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도시를 건설했다(창 4:16-17). 도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장의 “창 10:1-11:32” 부분을 보라.

 

   창세기 4장 나머지 부분은 가인의 후손을 7대에 걸쳐 소개하는데, 폭군적 행동을 보였던 라멕은 그의 조상 가인을 오히려 온순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라멕은 죄를 지으며 점차 더 강퍅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첫 번째로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어기고 일부다처제에 빠진 것이다(창 4:19; 마 19:5-6). 그다음으로는 피의 복수인데, 라멕은 단순히 자기를 쳤다는 이유로 살인을 했다(창 4:23-24).

 

   그러나 또한 라멕에게서 문명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문제를 야기했던 ‘노동의 분업화’는 라멕 시대에 전문화를 가져왔고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라멕의 아들 중 몇 명은 악기를 창안했으며 청동 및 철 도구를 사용해서 공예품을 만들었다(창 4:21-22). 음악을 창안하고 악기를 만들어 내고 야금술을 발전시키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창조성 범위에 드는 일이었다. 예술과 과학은 창조 명령의 귀중한 완성이지만, 라멕이 자랑하던 악행은 폭력으로 기울어진 타락한 문명에 수반되는 위험성을 암시했다. 타락 이후 최초의 시인은 인간의 자랑과 권력 남용을 칭찬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하프와 플루트가 나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됐으며(삼상 16:23) 야금술도 히브리 성전 건축에 쓰였다(출 35:4-19, 30-35).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은 다양하게 갈라졌다. 셋을 통해서 아담에게는 에녹과 노아 등 경건한 씨를 얻을 소망이 생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리 벗어난 한 집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1-5). 

 

​   너무나 부패해 하나님이 마침내 철저히 파멸하기로 작정하신 문화에 맞서 셋의 경건한 가계(결국은 노아와 그의 가족밖에 남지 않게 됨)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 대리자로 자처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반영한다고 믿는 원칙을 직장에서 준수해야 한다. 부정직, 불성실, 불량품 산출, 생계에 못 미치는 임금, 열악한 근무 조건, 노동력 착취와 같은 압박 속에서 일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겠는가? 셋의 이야기를 비롯해 성경에 나오는 많은 다른 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설계와 명령에 따라 살 수 있는 여지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사람들이 두려움, 불안, 의심에 빠지고, 권력이나 부나 사람의 인정을 향한 무한한 욕망에 굴복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일터에서 굳건한 윤리의식과 뚜렷한 목적, 긍휼함을 가진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은혜 없이 극복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이는) 고난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탐욕, 불공평, 증오, 무관심으로 학대를 당할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일어서서 정의를 세우고 상처와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만나는 죄에 대항할 힘이 있다. 그 죄가 다른 이의 행위에서 발생한 것이든 아니면 우리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불가능할 게 전혀 없을 것이다”라고 한탄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실제 능력을 언급하신 게 아니라 우리의 오만을 지적하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라고 하시며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받았다. 놀라우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것을 성취할 힘이 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이 권능을 믿는 사람처럼 일하는가? 아니면 그저 소란을 야기하지 않고 그럭저럭 넘어가려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헛것으로 만드는가?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 

“이젠 그만!” 새로운 세상을 작정하시다 (창6:9-8:19)

목차로 돌아가기

​   어떤 상황은 구제할 수가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상황은 구제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는 창세기 6장 6-8절에서 홍수 이전 세상과 문화에 대해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으며, 다시 시작하려는 그분의 결단을 듣는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아담 때부터 우리 세대까지 하나님은 필요할 때 죄악된 문화에 대항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아담은 그 시험에서 실패했지만 노아의 계보를 생산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창 6:9). 노아는 속죄적인 일을 행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땅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하기에 바쁜 다른 사람과는 달리 노아는 인류를 구원하고 자연을 파멸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노아에게서 우리는 제사장, 선지자, 사도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며, 환경 보호자로서 자연을 구속하는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자다. 크든 작든 노아 시대 이후 모든 일꾼은 구속하는 일은 물론 화해시키는 일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노아는 얼마나 엄청난 선박 건조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는가? 주위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수천 그루의 “고페르 나무”를 찍어다가 대패질해서 널빤지를 만들어 물에 뜨는 동물원을 축조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 3층짜리 배는 온갖 종류의 동물을 실을 만하고 무기한으로 필요한 음식과 물도 저장할 만큼 커야 했다.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순종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13-22).

 

   비즈니스 세계에서 기업가는 신상품이나 공정을 내놓을 때 위험을 감수하며 통상적인 지혜에 어긋나게 일하는 데 익숙하다. 단기간의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장기적인 견해가 필요하다. 노아는 때때로 불가능한 임무처럼 보이는 것에 직면했는데, 몇몇 성경학자에 의하면 그 방주를 실제로 짓는 데는 100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의심스런 눈빛과 비판자의 면전에서 믿음, 불굴의 의지, 세심한 기획도 필요했다. 아마도 우리는 노아의 개척자적인 개발 목록에 프로젝트 관리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혁신가, 기업가, 직장 내에서 우세한 의견과 시스템에 도전하는 사람은 내적인 힘과 신념이 필요하다. 우리가 반대나 낙담에 처할 때 해답은 우리 자신을 설득해 어리석게도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기도로 주의를 돌리며 하나님 안에서 현명한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이다. 정·재계, 과학계, 학계, 예술계 및 다른 수많은 일의 영역에서 혁신가의 창의성을 격려하고 다듬는 일에 은사가 있고 훈련된 갓 피어나는 크리스천이 필요하다.

 

   홍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으며 창세기 7장 1절 - 8장 19절에 나와 있다. 산꼭대기를 넘는 물속에서 방주를 뒤흔드는 홍수가 일렁이는 반년 이상의 기간 동안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동물은 방주 안에서 이리 튕기고 저리 튕겨야 했다. 마침내 홍수가 잦아들자 땅이 말랐으며 새로운 식물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방주에 탔던 자들은 다시 한 번 마른 땅을 딛었다.

 

   본문은 창세기 1장을 회상하며 창조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깊음” 위에 “바람”을 불게 하시니 “물”이 물러갔다(창 8:1-3).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홍수의 힘에 의해 다시 생겨난 신세계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화에 상처로부터 새로 시작하고 바로 잡을 기회를 주셨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이것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전조(前兆)가 된다.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사람의 생명과 일은 타락의 결과로부터 치유된 우주 안에서 완벽해진다.

 

   아마도 사람의 이 첫 번째 대규모 토목공사는 환경 프로젝트였는지 모른다. 뱀과 모든 피조물과 사람 사이의 무너진 관계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결과로(창 3:15),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물을 구원할 임무를 맡기셨으며 사람이 그 일을 신실하게 행하리라고 신뢰하셨다. 사람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면직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류가 타락할 때 잃어버린 것을 복구하기 위해 언제나 일하시며, 타락했으나 회복된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귀하게 사용하신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