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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서와 일

아티클 / 성경 주석

타락한 체제 안에서 일하다 (에1-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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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더서는 성경 밖의 역사에서는 ‘크세르크세스’로 더 잘려진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초호화판 잔치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에 1:1-8). 포도주를 과음한 후 아하수에로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와스디 왕후를 자랑하려 어전 내시에게 그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한다(에 1:10-11). 하지만 이 요구를 모욕적이라고 여긴 와스디 왕후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에 1:12). 이는 다른 참석자까지 거북하게 만들었는데, 이들은 그녀의 행동이 하나의 본이 되어 그 나라의 다른 여성들 역시 남편에게 저항하도록 자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에 1:13-18). 그리하여 와스디는 말하자면 ‘해고’됐고, 아하수에로 왕을 위해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는 절차가 시작됐다(에 1:21-2:4). 분명 이 이야기는 왕실 가정사를 다룬다. 그러나 모든 왕실은 정치적 일터이기도 하다. 따라서 와스디의 상황은 직장에서의 문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상사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자 하고, 이 여성이 그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자 그녀를 해고하는 상황인 것이다.

 

   왕은 와스디를 대신할 왕후를 찾으려 했고, 왕과 하룻밤을 보낼 준비가 된 에스더라는 한 젊은 여성이 후궁으로 들어온다(에 2:8-14). 우리 관점에서 보면, 에스더는 억압적이고 성차별적인 체제의 희생양으로서, 이기적인 폭군에 의해 처녀성을 상실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었다. 에스더는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와스디의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자신의 종족 정체성은 숨긴 채 자기 유익을 위해 그 체제를 오히려 이용한다(에 2:20). 에스더는 뛰어난 미모 덕분에 왕의 호감을 사고 새로운 왕후 자리에 오른다(에 2:17).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모두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통혼이 잘못된 행위라고 강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스 9:1-4; 느 13:23-27), 왕국의 후궁전에 자원해서 들어가 이방 왕의 아내가 되는 것은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우리는 에스라가 일부 유대인이 이방인과 통혼한 것에 비통해하며 기도한 것(스 9:13-15)을 이미 살펴봤기 때문에,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의 혼인에 대해 에스라가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보여 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충실한 준수와 에스더의 종교적 · 도덕적 타협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에스더는 남보다 앞서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행하고자 한다. 에스더는 다른 여인의 불행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기꺼이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에스더에 준하는 수준이든 아니든 간에 도덕적 타협은 일터에 있는 거의 모든 크리스천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직장에서 단 한 번도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상사가 부하를 해고함으로써 자기 무능을 감추거나 가장 더럽고 위험한 일이 다른 인종의 사람에게 배정되는 등 다른 사람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우리 자신에게는 유익이 되어 돌아올 때 절대 침묵을 지키지 않고 항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과거 성공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실제보다 부풀리거나 수업이나 일터에서 자기 지식을 실제보다 더 과장하는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진실을 숨기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에스더는 더 큰 권력과 영향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왕궁으로 들어간다. 에스더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에스더서에서는 하나님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아하수에로 궁전에 있는 에스더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도 갖고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에스더의 사촌인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 훨씬 더 양심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모르드개는 머지않아 아하수에로의 최고위 관리인 하만과 갈등을 빚는다(에 3:1-6). 하만은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온 유대 민족을 말살할 계획을 세운다(에 3:7-15). 모르드개는 그의 음모를 파악하고 이를 에스더에게 전달한다. 자기 민족 전체가 말살될 지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냉정해 보인다.

 

   에스더는 자신이 이 사건에 관여함으로써 자기 지위는 물론 목숨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변명을 내세운다(에 4:11). 실제로 에스더는 30일 동안이나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미 왕의 관심을 잃은 상태였다. 왕이 혼자 잠을 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여인이 ‘왕에게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에 4:11). 자기 민족을 위해 개입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모르드개는 두 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첫째, 에스더의 개입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의 목숨은 위험하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에 4:13). 두 번째 주장은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였다. 이 두 가지 주장으로 에스더의 태도는 완전히 변한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자신의 이익 외엔 어느 누구의 일에도 관심이 없고 출세만 노리던 야심가가 갑자기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겠다고 나선 것이다.

 

   모르드개의 두 주장이 각각 다른 본능에 호소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첫 번째 주장은 에스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한다. ‘에스더 너는 유대인이다. 만약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너도 발각되어 결국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암시와 함께 운명에 호소하고 있다. ‘에스더 네가 왜 수많은 젊은 여인 중에 왕후로 간택받았을지를 생각해 보라. 어쩌면 그것은 네 인생에 뭔가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주장은 비루한 반면, 두 번째 주장은 고귀해 보인다. 어떤 주장이 에스더를 변하게 했을까?

 

   아마도 모르드개의 두 가지 주장 모두 에스더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동일화다. 마침내 에스더는 자기 동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한 것과 똑같은 단계를 밟았다. 에스더의 경우에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 단계를 밟긴 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에스더의 마음이 열릴 수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섬김이다. 자기 동족이 멸절할 위험을 자신의 위험으로 동일시한 에스더는 왕에게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 재산, 목숨을 건다. 이제 에스더의 높은 지위는 이기심의 충족 대신 섬김의 수단이 된다. 신실하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던 에스더의 예전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본이 되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사용하신 것과 똑같이 에스더를 사용하신다. 에스더의 섬김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직장에 그대로 적용된다.[1]

 

  1.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사람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위해 윤리적인 타협을 한다. 우리 역시 에스더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도덕적으로 실패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기회와 책임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원칙을 무시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 직장에서 행해지는 기만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다. 회사 재산을 부당하게 사용해 왔는가?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 부서의 허위 기록을 바로 잡는 일에 당신을 쓰실 것이다. 과거의 위선을 핑계 삼아 현재 하나님이 당신으로부터 필요로 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는 없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오늘 당신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그 능력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본이다. 당신은 “제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윤리적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신다면 제가 지금 하나님께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할 수 없다.

     
  2.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실제 상황을 활용하신다. 에스더는 자기 지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부여받았다. 모르드개의 경우 자신의 지위를 통해 또 다른 종류의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독특한 기회를 포용해야 한다. 우리는 “제게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어쩌면 바로 이때를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3. 우리 지위는 영적인 면에서 위험하다. 우리는 우리 가치나 존재를 자기 지위와 동일시할 수도 있다. 우리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위험은 더 커진다. 에스더는 더 이상 자신을 젊은 유대인 여인이 아닌 바사의 왕후로 여겼다. 이와 같은 행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사실에 종속되게 만든다. CEO나 정교수가 되거나 좋은 직장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해져서 이 사실이 우리 존재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4.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 지위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당신 지위를 사용한다면, 그 지위는 물론 장래 전망까지 잃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직업이나 경력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경우에도 우리 지위는 얼마든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에스더의 경우는 극단적이다. 그녀가 자기 지위를 걸고 개입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또 개입하지 않더라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우리 입장은 에스더보다 정말로 더 안전한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당신이 영원히 지킬 수 없는 것을 잃을 각오를 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행한 일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에스더와 유대인들의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에스더는 초대받지 않은 채 왕에게 나아가지만 왕의 호의를 입는다(에 5:1-2). 그녀는 부드러운 말로 두 번의 잔치에 왕을 오게 하고(에 5:4-8; 7:1-5),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할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기 위선을 폭로하게 만드는 술책을 사용한다(에 7:6-10). 왕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판단을 철회하고(에 8:11-14)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부와 영예와 권력으로 보상한다(에 8:1-2; 10:1-3). 이들은 결과적으로 바사 제국 전역에서 유대인의 삶을 개선한다(에 10:3). 하만과 유대인의 원수는 모두 말살됐다(에 7:9-10; 9:1-17). 아달월 14-15일인 유대인 구원의 날은 그 이후 부림절로 지켜졌다(에 9:17-23). 

이 섹션의 아이디어들은 2007년 4월 22일 뉴욕 리디머장로교회에서 팀 켈러가 한 설교,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가져왔다. 이 설교는 http://www.gospelinlife.com/if-i-perish-i-perish-5610.html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반응

목차로 돌아가기

   앞서 살펴봤듯이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성경의 일부다. 따라서 주석가는 에스더서에서 베일에 가려진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일반적으로 다음을 가장 중요한 구절로 꼽는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이 구절은 에스더가 운이나 운명, 자신의 간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의 의지로 왕후의 지위에 올랐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벽에 글씨를 쓰는 신의 손을 볼 수 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스 8:18; 느 2:18).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일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다. 세속적인 회사가 승진과 급여 체계에 있어 편향성을 없앤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인가? 한 크리스천이 회사의 이중장부 관행에 종지부를 찍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선언해야 할까? 당신이 타협이 만연한 정치 부서에 일자리를 얻어 선을 행할 수 있을 경우, 하나님은 그 제안을 수락하라고 부르실까? 만약 당신이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라고 강요당하는 학교의 교사라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할까, 아니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 자리를 지켜야 할까?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Life@Work Journal, Vol. 2, No. 4.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James B. Stewart, Tangled Webs: How False Statements are Undermining America: From Martha Stewart to Bernie Madoff (New York: Penguin Press, 2011).

정보원의 요청에 의해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8월 23일 LA의 Biola대학에서 본 아티클의 초안을 논의할 때 언급됨.

Mystery Shoppers Providers Association, www.mysteryshop.org/your-business, accessed March 20, 2013.

ValueNotes blog, blog.valuenotes.biz/ethics-of-mystery-shopping/, accessed March 20, 2013.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HarperCollins, 1977), 585쪽.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

AU Section 411.01, Public Company Accounting Oversight Board, accessed on October 1, 2012 at http://pcaobus.org/Standards/Auditing/Pages/AU411.aspx.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tr. James W. Elli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1993, original, 1785), 30-36쪽.   Kant’s essay, “On a Supposed Right to Tell Lies from Altruistic Motives,” ibid 또한 보라.

C.S. Lewis, The Abolition of Man (New York: Macmillan, 1943)를 보라. 특별히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문명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미덕의 목록에 대한 부록을 살펴보라. 이것의 드문 예외사항이 있는데—배반과 사기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들이 조금 있다. 그 예시를 보려면,  Don Richardson, Peace Child: An Unforgettable Story of Primitive Jungle Treachery, 4th edition (Ventura, California: Regal, 2005)를 보라.